호남 정치학자들, 사전 검증에 나서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래 정치 리더십(political leadership)의 부재란 단어가 일상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왕이 길을 잃으면 백성들이 그 대가를 치른다.”는 영국 격언까지 공공연히 인용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책임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을 꺼린다. 그저 암묵적으로 ‘네 탓이오’만 되뇌며 희생양을 만들어 내려 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호남 지역의 정치학자들이 ‘내 탓이오’를 외치고 나섰다. 이들은 “한국 정치학계가 기존 대통령의 업적을 분석하는 데에만 열중했을 뿐 대통령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을 분석하고 정책과 이념을 평가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탓에 현재와 같은 정치 리더십의 총체적 위기가 초래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차기 대권 주자들의 리더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사전에 분석해 2007년 12월 19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리더십 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작업인데다 후보들의 정책마저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후보들에 대한 기존 연구 논문조차 별로 없다. 필자들이 “저널 수준의 글을 토대로 나름대로 정치학적 소양을 총동원해 아카데믹한 글을 써야만 했다.”고 토로한 것은 결코 변명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들도 말하듯 ‘국가의 앞날을 위해 대통령 후보를 분석한 글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차기 대통령 후보군을 분석, 연구한 최초의 정치학적 저술이라는 점’을 높이 살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간 사후 평가에는 적극적이었는지 몰라도, 자칫 불필요한 오해와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정치학자들 스스로 사전 검증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전례에 비춰 볼 때, 이들 정치학자들의 이 같은 시도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위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가?
이들은 먼저 우리에게 바람직한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리더십의 개념 및 기능과 체계, 그리고 그 연구 방법에 대한 기존의 여러 가지 이론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형태를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리더십 패러다임은 안정에서 변화로, 통제에서 자율로, 경쟁에서 협력으로, 사물에서 인간으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런 만큼 차기 대통령은 터커(Tucker)가 말하는 세 가지 정치 리더십, 즉 집단이 처한 상황을 분석해서 현재의 문제점 혹은 다가올 문제점을 파악하는 진단적 기능,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처방적 기능, 그리고 정책의 실행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자원을 이끌어 내는 동원적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아울러 개혁은 충격 요법이 아닌 점진주의적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거래적 리더십의 필요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대내적으로는 부드러운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을 갖추되 미시적 시각에서는 팀 리더십을, 거시적 시각에서는 촉진적 리더십을 요구받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민주적ㆍ국제적 리더십을 갖출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이 분석 대상이 된 - 집필자 사정으로 게재가 불가능해진 정동영을 제외한 - 5인, 즉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김근태, 노회찬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설정된 기준의 타당성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 정치학자들은 해당 후보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언급되는 비판이나 질문에 대해 그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분석을 진행한다.
포퓰리즘과 대중적 지지도의 간극
가령 김근태의 경우 2002년 3월 불법 선거자금 고백과 더불어 경선을 포기하면서 임종석으로부터 ‘행동하는 시대의 양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론 주도층에 비친 김근태의 개인적 특성만을 판단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도덕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수사(修辭)의 관계에서 볼 때 대중 정치인 김근태의 리더십 분석은 의미가 없다. 그는 대중성이 극히 저조하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비대중성은 다른 무엇보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정치와 수사에 대한 관계를 잘못 설정한 탓이다. 그는 대중과의 교감을 ‘전달의 문제’ 혹은 ‘연기나 연출’의 문제로 이해한다. 때문에 그는 대중 연설을 싫어하는데, 그것은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이성적인 지식인으로 상정하면서, 대중 정치인은 선동가와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대중적 수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포퓰리즘이라는 상호 비난으로 대중적 수사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증폭되는 현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디어가 정치적 통로를 독점하는 정치적 환경 자체가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인 인민에게 호소함으로써 인민 주권의 실질적인 내용을 구현하고자 한다는 정치적 표현을 사용하고,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제공한 대중적 수사의 선동과 조작은 다름 아닌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양도 불가능한 신념을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선험주의의 한계
반면 노회찬에게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제기된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다섯 가지 기준에 입각해 측정할 때, 그는 정책 능력, 대자적 사유 능력, 전략적 유연성, 절차주의의 내면화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연고나 명망 및 민주노동당의 집권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 기대감 등이 포함된 정치적 자원이란 면에서는 평균치에 비해 많이 낮다.
여성과 여성주의의 사이에서
그와 달리 박근혜의 경우 여성적 리더십 그 자체에 초점이 모아진다. 일찍이 여성적 리더십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통찰한 선구적 학자인 기든스(Giddens)에 따르면, 근대 사회가 보편화되면서 배태되는 정치적 문제들, 특히 민주주의 제도가 갖춰져 있음에도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는 정서적 교감, 친밀성, 신뢰, 존중, 평등 의식을 통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평등과 상호 간의 존경 및 열린 대화가 전개되는 정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내는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여성을 사회적 계층, 또는 계급적 범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이해관계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공하는 이른바 ‘여성주의적 리더십’이 존재한다. 대체로 행동심리학적 차원의 논의인 여성적 리더십과는 다른 정치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차원의 논의와 연결되는 여성주의적 리더십이 있는 것이다.
리더십과 팔로어십의 대치적 상황
손학규의 경우 기자, 교수, 중소기업인을 대상으로 대통령 적합도를 물을 경우 늘 1위를 차지하면서도,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한자리 수에 머무르는 ‘저평가 우량주’ 문제에 집중된다.
그의 경우 보수와 진보, 부자와 빈자, 세계화와 지방화, 평화와 통일을 수렴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개인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서로 조화시키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진 융합(fusion) 혹은 컨버전스(convergence) 리더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즉 그는 이러한 불균형 상태를 나름대로 균형 잡을 수 있는 적절한 지점, 적절한 뷸균형을 찾아내 우리 사회를 한데 묶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여타 정치인보다 이념, 지역, 계층, 세대 갈등, 남북 관계 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 즉 스스로 진보적 개혁주의자요, 개혁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경력과 자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력하고도 민주적인 리더십, 도덕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리더십, 지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리더십, 가치 지향적이면서도 목표 달성적인 리더십, 과감하면서도 포용적인 리더십, 혹은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리더십을 사람들은 바라지만 인간의 행동과 심성은 그같이 양향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처럼 적절한 불균형은 매우 어려운 리더십 전략이다. 우리 현실에서 양향성의 리더십은 정치적 정체성의 부재 내지는 리더십 실패의 전형이라는 평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리더십과 추종자인 국민의 팔로어십(followership)은 서로 선택하고 선택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하기도 하고 실종되기도 한다. 때문에 ‘나쁜 국민은 없으며, 오직 나쁜 지도자가 있을 뿐’이라는 지적과 ‘어느 나라나 그 나라에 맞는 정부와 지도자를 갖게 마련’이라는 상반된 지적이 모두 정합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추종자인 국민들은 자기 수준만큼의 지도자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손학규는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상호 발전되지 않는 난관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독선적 리더십은 과연 절대악인가?
이명박의 경우 그에게 따라다니는 여러 가지 비판들이 집중 분석의 대상이 된다. 가령 이명박에게는 ‘독선적’이라는 비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리더가 활용할 수 있는 의사 결정 방식은 크게 독단, 협의, 공동 결정, 위임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규범적 의사 결정 모델’에 따르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최선의 의사 결정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민주적인 공동 결정을 최선으로, 독단을 최악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윤리적 관점이지 정치적 관점이라 할 수 없다. 그 근거는 협의와 참여는 시간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효율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의사 결정의 질이 중요하며, 그 결정에 대해 구성원들의 수용도가 높다면 독단적 결정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단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상황을 무시하고 무조건 참여를 높이려 한다면 집단의 성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리더는 협의나 독단적 결정 방식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경우 협의는 상대가 지나치게 협소한데다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고, 게다가 리더 자신이 편협한 아집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국 독단으로 흐르게 된다. 참여 정부를 표방해 온 노무현 정부가 걸어온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역대 정부 중 가장 ‘참여’를 강조한 노무현 정부가 결국 ‘독단’의 전형으로 불리게 된 셈인데, 이는 상황과 조건을 무시한 참여의 확대가 집단 간의 갈등을 부채질할 뿐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명박에 대한 이런 식의 점검은 CEO형 리더십이 국가 지도자로서 적절하고 또 가능한 것인지, 이데올로기상으로는 그 위상이 어디에 위치한 것인지 등등으로 이어진다.
단순한 리더 교체만으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이나 지지도의 하락은 리더십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고, 위기에 당면할 때마다 리더와 추종자 모두는 새로운 리더십 혹은 변화된 리더십이라는 화두에 몰두해 왔다. 하지만 “새롭고 변화된 리더십은 리더가 새로 바뀐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리더와 정치 역학 관계에 있는 여야와 국민들의 상호 작용도 리더십의 성격을 구성하고 발휘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된다.” 따라서 국민들은 이번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에게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지 분명히 표시해야 한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식으로 자학하지는 말자. 랑케가 이야기했듯 ‘국가라는 배를 조타하는 예술은 모든 예술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예술’이니까. 게다가 비스마르크가 말했듯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