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합 안 맞는 모녀, 어쩌다보니 데이트
가족, 그 중에 모녀. 엄마와 딸, 그 관계의 환상은 어떤 게 있을까. 엄마랑 딸이 팔짱을 끼고 너무나 신 나게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하며 쇼핑을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음~ 맛있구나 하며 남 보기에도 흐뭇한 풍경을 연출하는 것, 흔히 드라마에서 많이 보는 풍경이다.
물론 엄마와 딸이 친구처럼 다정하고 서로 취미도 딱딱 맞는 게 관계적으로도 올바르고 보기에도 좋다. 하지만 막상 그런 모녀들을 보면 나와 엄마 사이는 왜 저럴 수 없는 거지 하며 속상해하거나 우리 집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엄마와 딸이 늘 서로 깊이 이해하고 하하 호호 웃으며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그야말로 ‘로망’일 뿐인데 하면서.
그녀들도 그랬다. 『엄마와 두 딸의 발칙한 데이트』라는 상당히 발칙한 책을 쓴 정숙영과 동생 정지영 또한 엄마와는 취향도, 입맛도 정말 다른 ‘궁합’ 안 좋은 모녀 사이였다.
옷을 사러 나가거나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이어서 외식을 하러 가거나 하면, 엄마와 우리 두 딸은 늘 안 좋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옷을 사러 나가면 엄마는 딸들의 취향을 두고 “이걸 지금 옷이라고 고르는 거냐.”며 타박하고, 엄마가 “이런 게 너희들에게 어울린다.”며 골라 준 옷가지나 신발은 딸내미들의 불효막심한 장롱 속에 몇 달씩 틀어박힌 채 햇빛 한 번 못 보기 마련이었다.
밥을 먹으러 가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육식동물인 딸들은 ‘스님’스러운 미각의 엄마와는 애초에 종種부터 달랐다. 게다가 우리 모친, 입맛 또한 어찌나 ‘맛의 달인’스러우시며 자연친화적이신지 조미료, 느끼한 식재료, 단 것, 이 세 가지는 엄마에게 있어 천벌을 받아 마땅한 독약이었다. … “이걸 이 돈 주고 먹느니”로 시작해서 “어휴,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려.”로 방점을 한 번 찍어 주시고, 급기야 카운터로 달려가 “이건 틀렸어요. 돈 받고 파는 음식이 왜 이래요!”라며 주인장을 응징하는 단계까지. (데이트의 시작 : 엄마와 두 딸의 첫 만남 ‘엄마, 진짜 괜찮은 거야’ 중에서)
상당히 익숙한 풍경 아닌가. 드라마 속 ‘샤방샤방’한 꽃 캐릭터 모녀 말고 진짜 나와 내 엄마 사이 아닌가 말이다. 법적으로 성년이 되고 소위 ‘시근’이 들어 엄마에게 좀 잘해 드리고 싶다가도 기껏 내가 사 온 선물을 가리키며 얼마 주고 샀냐, 너무 비싸게 샀다, 이런 걸 뭐 하러 사냐며 타박하고, 내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 함께 먹고 싶어 큰맘 먹고 외식시켜 드리면 여긴 얼마냐, 왜 이렇게 비싸냐, 집에서 먹으면 돈이 반도 안 들 텐데, 너무 달다, 너무 짜다 그러고, 엄마에게 옷 한 벌을 사 드리고 싶어 쇼핑을 나가면 옷도 입어 보지도 않고 가격표부터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이런 옷 필요 없다며 손사래 치고…. 한마디로 대략 난감 엄청 좌절(OTL). 엄마에게 뭘 좀 해 주고 싶어도, 엄마랑 뭘 좀 하고 싶어도 그 과정이 너무 ‘피곤’하기에 지레 포기하고 마는 정숙영과 정지영. 그것이 바로 실제 너와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랬던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집이 아닌 밖에서 엄마와 만나 시간을 보내자고 결심하게 된 것은 ‘어쩌다 보니’였다.
엄마와 데이트, 정말로 진짜?
엄마와의 첫 번째 데이트에서 두 딸은 ‘발칙하게도’ 채식주의자에 가까운 엄마의 입맛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버터에 크림소스 칠갑인 파스타와 육즙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를 시켰고, 엄마는 오로지 공짜로 주는 빵을 수프에 찍어 드시면서도 딸들과의 십 년만의 외출을 정말로 즐거워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들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베트남 음식점을 비롯해 인도․네팔 음식점에 가고, 영화와 공연을 보고, 전시회를 가고, 그냥저냥 쇼핑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엄마의 까칠한 태도에 속상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정말 좋아하시겠지 했는데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실망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엄마와 두 딸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연애하듯 만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일상을 함께하는 사이, 더구나 매일 얼굴 보는 사이라면 작은 변화는 눈치 채기 어렵다. 이를테면 가족이 그렇다. 부모가 자식을 옛날의 그 어린아이로 보는 것도, 자식이 부모를 옛날의 그 젊은 아빠 엄마로 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자식은 끊임없이 반항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서로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결혼을 해야, 혹은 자식이 생겨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세간의 속설 혹은 믿음은 어쩌면 부모가 되어야 부모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미 일상을 함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모가 늙어 가는 걸, 이미 자신이 부모보다 더 힘이 센 어른이라는 걸 늦게 깨닫는 데 기인하는 게 아닐까.
정숙영, 정지영 자매는 집이 아닌 바깥, 일상을 살짝 벗어난 공간에서 엄마를 만나며 설거지 냄새 풀풀 풍기고 엄청나게 잔소리를 해 대는 ‘엄마’가 아니라, 사물과 사람에 호기심 많고 흥이 넘치고 귀엽기까지 한 여자 ‘최남선’(엄마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야말로 엄마의 재발견!
그렇게 두 딸은 엄마와 데이트하듯 연애하듯 만나며 드디어는 가족의 성원이 아닌 최남선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게 되고, 엄마 또한 품 안의 자식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딸을 바라보며 딸들의 개성을 이해까진 못해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당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어느 못된 딸의 수줍은 고백
이 책은 이 세상의 모든 무덤덤한 모녀들을 위한 책이다. 어쩌다 한 번 엄마와 외출한 기억이 너무나 피곤해 다시 시도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마음만 효녀인, 그러나 엄마와 정말 살갑게 친해지고 싶은 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저와 같은 ‘못된 딸’들, 사는 데 하루하루가 급급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딸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필자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그래, 엄마의 잔소리 폭탄을 각오하고라도 맛있는 음식점, 재미있는 공연, 신 나는 영화관, 번잡한 쇼핑을 함께 하고 싶다는 욕구와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솟는다. 우리 엄마 역시 다른 엄마랑 별로 다를 바 없는 보통 엄마이고, 그렇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최 여사처럼 앞에서는 잔소리 폭탄에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도 뒤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딸과 뭐 했어, 내 딸이 해 줬어, 하면서 신 나게 자랑하실 테니까. 무엇보다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