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신선한 학술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일본에서는 분로쿠·케쵸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고 부르는 임진왜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갓 통일된 일본 측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 세 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일종의 '국제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과 전개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과 명나라 군대에는 적잖은 서양인도 참전하고 있었던 만큼 실제로는 당시 전 세계인이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였던 일종의 세계대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1540년대 포르투갈 인들이 최초로 상륙한 이래 유럽의 무역상과 천주교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도 국제 전쟁인 임진왜란은 하나의 중대한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예수회 신부들이 직접 전쟁에 종군하여 기록을 남기거나, 참전하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전쟁 당시의 일본의 상황 등을 근거로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본국의 예수회에 보고하였던 것은 그러한 관심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그러한 종류의 문헌 기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전쟁에 참전한 당사자의 기록이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겪은 일을 과장하게 마련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처럼 바다를 건너와 낯 설은 이국땅에서 전쟁을 벌인 경우에는 그러한 정당화와 왜곡의 정도가 훨씬 크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이었던 서구인의 눈에 비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의 전반적 정세나 전쟁의 발발과 전개 등에 대한 객관적 기록은 그러한 정당화와 과장의 위험에서 비교적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국내의 임진왜란에 대한 기존 연구가 대체로 국내 문헌을 위주로 하였던 관계로 이제껏 막상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 측의 사정에 대해서는 연구를 소홀히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일본에 와서 오랜 기간 활약하였던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문헌으로서 임진왜란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지적 욕구까지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대해서
1590년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이른바 '덴카비토(天下人)'로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권력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와 위상에 비해 정작 그의 인간적 성격이나 면모를 전해 주는 기록이나 문헌은 별반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일본 역사에서는 히데요시가 최하층 민중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최고 권력자에까지 올랐던,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탓인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거나 기술하는 일 자체가 터부시되어 왔던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히데요시)는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서 한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이였다. 눈이 튀어 나왔고, 중국인처럼 수염이 적었다. 자식복은 없었으나 빈틈없는 책략가였다. 그는 수많은 악행과 심술궂은 짓을 저질렀다. 가신뿐만 아니라 국외자에 대해서도 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으며 그에 대해 증오심을 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와 같은 프로이스의 부정적 묘사는 매우 희귀한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측의 어떠한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히데요시가 육손이라는 신체적 결함까지 과감히 언급하는 이 같은 기록을 남겼던 이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였다. 그는 30년 남짓의 오랜 기간을 일본에 체제하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었던 갖가지 사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것이 훗날 『일본사(Historia de Japam)』라는 형태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프로이스가 애초에 다루고자 했던 것은 일본에서의 천주교 포교와 발전의 역사였지만 그 기술 내용 가운데에는 천주교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국외자라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역사가로서는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실 가령 천황이 몹시 궁핍하게 살았다든가, 쇼군(將軍)이 매우 어리석었다든가, 히데요시가 매우 기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을 거리낌 없이 언급하고 있다. 당시 프로이스에게 『일본사』를 작성할 것을 명하였던 일본 예수회 순찰사 발리그니아누(Valignano)가 원고를 읽고 나서 출판을 보류시키는 한편 어느 누구에게도 그 내용을 일체 누설치 말토록 금하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 결과 프로이스의 『일본사』 초고는 출판이 보류된 상태로 18세기에 빛을 볼 때까지 마카오의 예수회 문서관에 보관되는 기이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애초 프로이스 원고의 결점으로 지적되었던, 마치 상인의 회계 장부와 같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세밀하다는 특성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그의 『일본사』를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약하였던 16세기 일본 쇼쿠호(織豊) 시대의 정치·문화·종교와 풍속의 실상을 가장 잘 알려 주는 동시에, 1592년 임진왜란이 개전(開戰)되던 당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신뢰할 만하고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의 여러 모습들
-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병사들의 이야기로는 조선군의 하급자 중에는 약간 비겁한 자들이 눈에 띄었으나 상급자들은 매우 용감무쌍하였다고 한다. 앞서의 젊은이 루이스는 기마병으로 참가했던 조선군 지휘관 중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생포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은 명예가 걸린 문제이므로 자신은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15장에서
조선군의 당초에는 일본군을 크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으나 일본인들에게 복종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전력을 다해 과격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일본군에는 두 가지의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 일본에서 바다로 수송되는 식량을 각지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병사들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한 수송 인력은 소수였기 때문에 조선의 병사들은 지리에 익숙한 점을 십분 활용해 각지에서 매복해 있다가 습격하여 일본 병사들을 죽이고서는 운반하던 식량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 - 16장에서
그들이 바닷가를 휘젓고 다니면서 해적질을 하였는데, 일본 배를 발견하면 곧바로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보다도 해전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이러한 일본군의 재난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 16장에서
- 당시 명군(明軍)은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
아고스띠뇨와 싸우러 온 중국의 조승훈 휘하의 병사들은 달단 인과 인접한 국경 지대에 주둔하는 부대(요양 부총병의 군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웠기 때문에 사실 그들이 전장(戰場)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매우 용감하고 전술에도 뛰어났다. 이 때문에 아고스띠뇨는 중국인의 실력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의 전투 경험을 통해 그들의 전투 능력에 대해 새삼 인식을 바꾸었던 것이다. - 20장에서
일본군은 사전에 유격 심유경에게 아카쿠니의 요새인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심유경은 이전부터 조선인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였고, 화평 협상은 단지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중국인과 함께 외곽으로 철수하고서는 조선인들만 일본군에 맞서서 싸우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 21장에서
- 임진왜란으로 입은 각 국의 피해에 대해서
가장 믿을 만하고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병사와 짐마차 꾼으로 15만 명이 조선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중에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5만 명이 사망하였다. 게다가 적군에게 살해된 경우는 소수이고 그 대부분은 전적으로 과로·기아·추위 및 질병 등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죽은 자와 포로가 된 자의 숫자는 일본인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교토와 그 외의 지방에 끌려온 자들을 제외하고서도 이곳 규슈에 있는 조선인 포로만 해도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 21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