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철학 책인가?”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서문에서 제기된 이 질문보다 책의 특성을 더 잘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외관상 이 책은 철학 책이다. 우선 이 책에서 답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논증할 것을 요구한 주제들이 모두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라고 하는, 1808년 나폴레옹 시대에 도입된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 중에서도 철학 과목에서 출제된 것들이다. 그것도 모두 1997년 이후에 출제된 주제들로만 모았다. 게다가 구성을 보라. 의식과 무의식과 주체를 따지고, 시간과 존재와 죽음을 되새기는가 하면, 이성과 감성을 논하고, 신화와 과학과 철학을 분별하고자 한다. 뿐인가. 기술과 예술과 아름다움을 짚어 가면서 자유와 노동, 교환과 역사를 파악하려 한다. 과연 이보다 더 철학적인 질문이 있을까?
작가, 만화가, 과학자, 변호사들이 철학에 답하다
하지만 제시된 주제에 대한 답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들의 답안을 답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부터 망설여지는 것이다. 단편 소설이나 시, 소희극, 대화는 물론이고 만화까지 등장할 정도로 답안을 작성한 형식이 기발하고 창의적이며 자유롭다.
답의 분량이나 문체도 그렇다. 대저 논술이라 하면 거기에 어울리는 형식이 있고, 문체가 있다. 반드시 근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글의 분량이라는 것이 단 몇 줄로 끝나는가 하면, 십여 쪽에 이르는 긴 것도 있다. 문체 또한 제각각이다. 유머러스한가 하면 진지하고, 참여적인가 하면 서정적이고, 직설적인가 하면 반어적이다.
혹자는 이런 불균형을 답을 작성한 이들의 면면에서 찾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지은이 소개에 나와 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필자들은 작가에 만화가, 과학자, 교사, 변호사 등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나름 소정의 철학 교육을 마치고, 프랑스 정부가 공인하는 철학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다. 게다가 답을 작성한 이들 중에는 권위 있는 정통 철학자들도 있다. 과연 이 철학자들이 철학적 논증이 무엇인지를 몰라 이런 식으로 답했을까?
철학을 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철학도 없다!
이쯤 이야기하면 이미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이 책은 철학 논술에서의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자신 속에 내재한 철학적 영감의 원천을 찾도록, 다시 말해 철학에 대한 진정한 욕구를 발견해 나가도록 돕기 만들어졌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의 지은이들은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상태에서, 구체적으로 말해 바칼로레아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형식과 조건상에서의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상태에서 답을 썼다. 이에 대해 일찍이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했듯이, “이제 아주 오래전부터 해 오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철학 책을 쓸 수 없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에 대한 욕구이다. 이들 생각에 작금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이유는 명쾌하다. 필자들은 철학이 결코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이름이나 외우고, 철학자들이 사용한 개념이나 이론의 핵심을 머릿속에 강제로 집어넣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이미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비판하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자기만의 답을 찾아 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늙고 성마른 철학의 근엄한 가면을 벗겨라!
그런데 왜 오늘날은 철학 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 흄, 칸트, 헤겔, 후설, 비트겐슈타인 등을 주르륵 읊어 대야 하는가? 왜 철학적인 답이라고 하려면 본질과 속성, 실체와 존재, 감각과 인식, 현상과 사물 자체를 여기저기 늘어놓아야 하는가? 왜 우리가 하는 진지한 실존적 고민에 대한 답은 하찮은 ‘인생 철학’ 내지는 ‘개똥 철학’으로 폄하되는가?
이 책의 지은이들에 따르면 이 모두가 늙고 성마른 노인네가 된 철학이라는 관습적인 근엄한 가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늙고 성마른 부인네 같은 지청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담하게 된 결과, 이제 철학은 아무도 없는 황야의 텅 빈 성채 같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스스로 비판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가는 여정에서 여러 가지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과 철학적 글쓰기가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도구일 뿐이지 않을까? 그보다는 그 도구를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단적으로 철학을 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철학은 없는 것 아닐까?
이제 철학에서 이름과 용어와 이론은 버려라!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순진함,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직접성, ‘사물 자체’로의 회귀, 다시 말해 새로운 시선을 추구해 왔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즉 그 유명한 ‘철학적 놀람(étonnement philosophique)’이란 어린이나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을 다시 찾아내려는 우회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표현 자체가 함정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순진함의 또 다른 형태가 바보짓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는 철학에서 철학자들의 이름이나 용어, 개념과 이론을 벗겨 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추상적인 개념이 첩첩이 쌓인 철학적 논의에서 철학의 본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철학에 흥미를 잃게 되는 철학 초심자들이 철학의 길에 즐겁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이 책의 지은이들이 희망하듯이, 누구에게나 “돛에 부는 바람처럼 독자들의 등을 떠밀어 사유의 길 위에 세우면서도, 억압하지 않고 자유를 선사하는 미덕”을 철학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철학자들을 훈련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말이다. 이 책 필자들의 희망은 소박하다. 이 책 독자들 중 단 한 명에게라도 철학을 하도록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유쾌한 철학 교실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이 책의 핵심이 된 것도 그래서이다. 이 책의 다양한 텍스트들은 유쾌하다.
철학적 질문에 대해 지은이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삐딱하다는 말 그 자체이다.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기도 하고 위장된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문제에 뛰어들기도 하고 은밀하게 접근하기도 하고, 습격하기도 하고 전면전을 벌이기도 하고, 뻔뻔스럽게도 다가가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지은이들은 재미와 지적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는데, 특히 철학자들의 경우가 그랬다. 이 책 각 주제에 답을 한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재미있게 읽도록 하기 위해 다른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허구의 형태로 글을 쓰거나, 더욱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의 형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 놀이에 가담했다. 철학자 이외의 저자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와 친밀한 주제, 또는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 주제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이 책의 텍스트나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 줄 뿐이다. 그것들은 모범이 되고자 하는 오만함이 없는 일련의 ‘경험들’이며, 어떤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거의 없는 현재 진행 중인 살아 있는 다양한 사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지식을 근거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해서 ‘개똥 철학’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그런 부족도, 그런 지나침도 모두 우리 아니던가? 그런 자신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전보다 한층 현명해진 것임을 예지의 신 아폴로가 델피의 무녀의 입을 빌어 소크라테스를 통해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제는 원래의 철학이 부활되어야 한다. 지식 체계로서의 철학이 아닌 근본적 사유로서의 철학이. 이 책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자명한 현실을 지극히 삐딱한 태도와 파격적인 스타일로 제시하기 때문이리라.
∴ 이 책에 대해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철학적 논문의 모범이나 정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이 출판할 가치가 있는 책으로 확신하고 번역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어떤 것은 자기모순을 보여 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과학자이거나 극작가인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것은 그 글이 바로 소설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고, 어떤 것은 그 글이 시적 언어나 애매한 표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답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들이 철학자들이 평가한 최고의 답안이거나 모범 답안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해 보고 싶었고, 지금도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고’나 ‘모범’은 우리를 가르치려 들고 평가하려 든다. 하지만 이런 삐딱한 글들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최고나 모범으로 간주된 기준들을 배워 모방하려는 데서 벗어나 진심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시도해 보고, 그 생각을 써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어떤 면에서 가장 좋은 교과서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이 수만 가지 방향으로 가지치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질문을 중심으로, 이 책에 제시된 답안을 놓고, 질문을 다시 질문해 보고, 답안을 비판해 보고, 또 다른 방식으로 질문에 대한 답안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능한 가장 철학적인 철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바칼로레아란…
프랑스에서 흔히 바크로 약칭되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나폴레옹 집권 당시인 1808년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해 1902년에 현재의 형식으로 완비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수능시험이나 독일의 아비투르, 미국의 SAT에 해당되는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이다.
일반계, 기술계, 직업계로 대별되는데, 우리나라의 수능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일반계는 다시 문학, 경제사회, 과학 계열로 세분되며, 시험은 프랑스어, 철학, 역사·지리, 제1 외국어, 수학 등의 필수 과목 외에 계열에 따라 물리, 화학, 생물학, 지질학, 경제학, 고대 그리스·라틴어, 제2 외국어, 제3 외국어 등이 추가되어, 적게는 9과목에서 많게는 12과목이다.
대부분의 시험이 논술식이며, 필기시험만이 아니라 때로 구두시험까지 병행되는 이 바크에 대해 사회당 정권 때 교육장관이자 문화장관이었던 자크 랑그 같은 이는 “중등 교육과 고등 교육을 잇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격시험이자 프랑스의 국민적 기념비”라고 격찬한다.
하지만 시험 시행 관련 예산만도 수천 억 원씩 소모되는 데다, 채점 방식도 철저하게 채점자에게 전권이 있고, 수험생이나 학부모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항의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구조 탓에 『렉스프레스』 같은 경우 “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이런 괴물 같은 제도를 만든 적이 없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재앙”이라고 가 혹평한 바 있다.